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홀시 (문단 편집) === 전쟁 이후 === 일본군의 항복 후 항복 조인식에 참석한 홀시 제독은 그 후 10월 25일에 [[샌프란시스코]]로 돌아가서 퇴역신청을 냈는데, 오히려 [[해리 S. 트루먼]] 대통령은 4일 후에 그를 [[원수(계급)|원수]]로 추대했다. 원래 원수로 추대되는 것은 전쟁 중에 이미 결정이 난 상태지만 동일한 함대를 교대로 지휘하면서 아직 대장계급인 [[레이먼드 스프루언스]] 제독의 문제 등이 있어서 미루어진 것이었다. 그 외에 46년 시점에서 홀시는 해군의 소장급 제독 조기퇴역 선정 위원회(가칭) 의 위원장으로 활동했는데 이 위원회의 구성원은 모두 4성 제독들로 레이몬드 스프루언스, 토마스 킨케이드, 존 타워즈, 마크 미처 제독(타워스와 미처는 전후에 대장으로 승진) 등이 있었고 모두 전쟁에서 활약한 최고위 지휘관들이었다. 전쟁 중의 팽창으로 늘어난 제독들의 정원을 종전 후 군축의 흐름 속에서 구조조정을 단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된 이 위원회는 당시 복무중이던 215명의 해군 소장들[* 이 정원이 얼마나 많냐면, 훗날 9년 후인 1955년에 알레이 버크 소장이 해군참모총장으로 전격 발탁될 당시에 그의 선임 2, 3, 4성제독이 92명이었다.] 중 50명을 선정해서 조기퇴역을 권고하기위한 목적으로 활동했다. 이 외에 여러가지 전후 처리 업무들을 수행한 홀시는 1947년에 퇴역했다. 그 후 홀시는 정부 임원과 여러 회사의 중역들을 거치다가 1957년에 [[뇌졸중]]으로 모든 직함에서 물러났고, 2년 뒤인 1959년 8월 16일, 자택에서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. 홀시의 장례는 국장으로 진행되어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치됐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